김인규 마주
‘3김’ 비교론

지난 23일 오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 대통령의 영정을 보며 큰 절을 두 번 올리는 순간 그의 생전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김 사장! 건강이 제일 중요하데이. 조깅하지 말고 배드민턴이 좋데이.”
KBS 사장 재직시 연초가 되면 이른바 3김(三金) 즉 김영삼 대통령의 상도동,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그리고 김종필 총재의 청구동 자택을 찾아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니까 2010년, 2011년, 2012년 3년 동안 1월초에 세 군데를 세 번씩 찾은 셈이다. 상도동에 새해인사를 가면 언제나 말끔한 양복차림으로 덕담을 나눈 뒤, 대문 앞까지 배웅하며 건강을 당부하던 말씀이 그의 영정 앞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은 이휘호 여사를 찾았다. 이처럼 3김 씨를 찾아 새해인사를 올린 데는 공영방송 사장으로서의 도리일 수도 있지만, 내 나름대로 30여 년 전 취재기자로서 이들의 자택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기억과 추억이 한 몫을 한 것 같다.
우선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한 김영삼 대통령, YS 하면 ‘大道無門’이 생각난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상도동 자택에 연금 상태일 때,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몇몇 출입기자들에게 이 ‘大道無門’이라는 이 휘호를 써서 전달했다. 그러니까 35년 전 6월초쯤 당시 김덕룡 YS비서실장이 여의도 KBS 후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가택연금 중인 YS에게 무슨 일이라도 났나 하는 본능적 궁금증에 급히 나가보니, 김 실장은 허리춤에 끼고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며 “이건 가택연금 중인 총재님이 울분을 참으면서 쓴 것”이니 잘 보관하란다. 그러면서 마치 은밀한 비밀문건처럼 이 두루마리를 남들 보지 않게 얼른 감추라는 몸짓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문제가 안 될 글씨 한 점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야당 정치인들에게는 몸조심이 배어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들어와 풀어 본 두루마리에 쓰여 있던 휘호가 바로 YS의 유명한 ‘大道無門’이다. (사진 게재)
‘大道無門’ 휘호 자체는 YS가 자주 사용하던 말이라 그러리라 했지만, 글씨 오른쪽에 당시 출입기자였던 필자의 이름 밑에 ‘同志’라는 호칭이 사뭇 의외였다. 당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성을 맹세한 ‘끈끈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同志’라는 호칭과 함께 힘이 넘치게 써 내려간 ‘大道無門’에서 당시 초년병 정치부 기자의 눈에도 YS의 야망과 힘이 느껴졌다.
이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1990년초 10여년의 정치부 기자를 마치고 정치부장을 맡아 데스크를 지킬 때다. 그해 여름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가 정성들여 쓴 글씨라며 액자를 보내 왔다. DJ가 써 보낸 글씨는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이라는 시조 한 수였다. (사진 게재)
국난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잠 못 이루며 고민하는 대장부의 심정을 토로한 글인데, 아마도 DJ 자신의 심정을 에둘러 표현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시조 내용보다도 눈길을 더 끈 것은 필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당시 필자가 정치부장이었던 만큼 당연한 ‘部長’이라는 호칭 대신 ‘先生’이라고 쓰인 것이 아닌가. ‘先生’이라는 표현을 상대를 존경한다는 매우 높게 부르는 존칭어인데 말이다. 언뜻 YS가 써 준 ‘同志’와 비교가 됐다. 이 호칭만 보더라도 두 분 兩金 정치 스타일의 차이를 엿 볼 수 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90년 가을, 이번에는 JP로부터 글씨 한 점을 액자로 전달받았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자당 최고위원이었던 JP는 ‘時和世泰’라는 휘호를 보냈다. 아마도 몇 달 전 이뤄진 ‘3당 합당’을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심정이 담긴 듯 했다. 휘호 내용도 내용이지만 JP는 필자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썼을 까 궁금증이 앞섰다. 당시 정치부장이었던 필자 이름 뒤에 ‘部長’이라고 쓴 것이다. YS의 ‘同志’나 DJ의 ‘先生’이라는 호칭처럼 어떤 주관적 의미를 배제한 채 현재 직함 그대로 ‘部長’을 쓴 것이다. (사진 게재) 혹자들은 JP의 이런 객관적 표현, 다시 말해서 정치적 용어사용을 자제한 행태가 결과적으로 한국 정치풍토에서 3김씨 가운데 그만이 대통령에 오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70-80년대만 해도 정치인들이 취재 기자들에게 자신의 휘호를 담은 글씨를 정성들여 써서 선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당시 오랜 기간 여야 정당을 취재했던 필자도 서예 실력을 갖춘 수십 명의 정치인들로부터 글씨를 받았다. 그런데 운 좋게도 당시 우리나라 정치를 주도했던 3김으로부터 글씨를 모두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 만큼 3김 정치를 지켜본 정치부 기자로서의 의무감에서 3김의 글씨를 오랫동안 보관해 왔다. 그러다 KBS사장으로 부임하던 날 사장실 접견실에 이 세 분의 글씨를 나란히 걸어 놓았다.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싶다는 단순한 의도였는데, 의외로 사장실을 찾은 수많은 외부 인사들과 환담을 나누는데 좋은 소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일본이나 미국 등 외국의 주요 언론사 관계자들은 이 세 사람의 글씨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과 함께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더구나 이런 저런 이유로 KBS 사장실을 방문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벽에 걸린 ‘三金’의 글씨를 보고는 필자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본의 아니게 세 분 정치 지도자들 글씨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나란히 걸린 글씨 3점)

YS, DJ, JP 세 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정치의 보스이자 한국 현대정치사의 주역이다. 결국 YS는 14대 대통령, DJ는 15대 대통령으로 꿈을 이뤘고, JP는 비록 제 2인자의 위상에 그쳤지만 한국정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 세 사람을 취재기자로서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어록(語錄)에서도 3김의 개성이 들어난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옵니다. 여러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YS는 야당지도자 시절 대구역 광장 등 여러 곳에서 이렇게 외쳤다. 언뜻 너무 자극적인 표현처럼 들렸지만 그 당시 청중들은 이 한마디에 군부독재로 가슴속에 쌓였던 울분을 함께 토해 내며 열광했던 것이다. 날카로운 톤의 YS 연설은 한 마디로 직선적이며 반복적 어법이다. 일방적 연설형태로 군중의 심리를 사로잡았다.
“국민 여러분!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입니다.”
YS와 함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구수한 톤의 DJ 대중연설은 즉흥연설이지만 언제나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이어져 기자수첩에는 매우 논리적 연설문으로 기록되곤 했다. 연설 말미에는 늘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라는 형식으로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쌍방형 어법이 눈길을 끌었다.
“여러분! 수장다욕(壽長多辱)이란 말이 있지만 다욕수장(多辱壽長)이예요.”
兩金 씨와 달리 JP의 연설은 충청도 화법이라서 그런지 듣기에 부담 없고 유머가 넘친다. 그가 즐겨 쓰던 한자 어록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오래 살다보면 욕먹을 일이 많다지만 자신은 욕먹을 일이 많다 보니 오래 살 것이라는 다욕수장(多辱壽長)이라는 어록이 압권이다. JP 나름대로 걸어온 정치적 행로와 역경을 빗대어 한 말이지만, 실제로 3김 씨 가운데 제일 장수를 누리고 있다.
취재기자로서 3김과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함께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식사나 술자리에서 3김 가운데 누가 제일 재미있었을까? 단연 JP다. JP는 언론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 재미난 얘기 보따리 풀어 놓았다. 언론인들이라면 누구나 흥미로운 정치적 비사(秘事)를 느릿느릿한 말투로 털어 놓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일쑤다. 자신과 관련된 엄청난 정치적 사건들의 뒷얘기를 남의 일처럼 술술 엮어가는 화술은 최근 중앙일보에서 연재된 JP 회고록 바로 그대로였다.
두 번째로 DJ를 꼽을 수 있다. DJ는 비록 주량이 약하지만 회식자리 끝까지 남아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어느 술자리에서는 좀 과음을 했다며 잠시 옆방에서 휴식을 취한 뒤 술자리에 합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DJ는 평소와는 달리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를 써 가며 유머 보따리 풀어 놓고는 자신이 먼저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가끔은 취중에서 야한 얘기 즉 ‘와이담’을 슬쩍 꺼내 놓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과 비교하면 YS의 회식 자리는 차분한 분위기다. 원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술을 삼가는 YS는 술자리 자체를 가급적 사양하는 편이었지만, 부득이 술자리가 마련되면 미리 준비해 온 와인 한두 잔으로 분위기를 맞추어 나갔다. 특히 야당 총재시절 YS는 때가 때인지라 그래서 인지 회식자리에서도 재밌는 화제로 분위기를 즐기기 보다는, 하고 싶은 용건을 단도직입적으로 꺼내는 바람에 좌중의 분위기를 정치적 이슈로 이끌어가곤 했다.
술자리나 식사자리가 끝난 뒤 대금 지불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이다. YS는 회식을 마치고 나면 식사 대금이나 술값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떠나 버린다. 비서진이 남아서 모두 해결하기 마련인데, 간혹 식사대금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비서진이 당황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에 반해 DJ는 식사 등 회식이 끝나면 어김없이 종업원에게 계산서를 갖고 오라고 해서 좌중에 앉은 채 계산내역을 꼼꼼히 살펴본 뒤,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정확하게 지폐를 세어 종업원에게 건네는 세심한 모습을 보였다.
JP와의 어느 만찬회식에서 목격한 일이 특히 인상적이다. 술자리가 파할 즈음 여주인을 불러 옆자리에 앉힌 JP는 느닷없이 바지 옆 주머니에서 지폐 한 움큼을 꺼내 “오늘 수고 많았소. 이것이면 될 줄 모르겠네?”라며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만의 풍류가 느껴져 보기 좋았다.
이밖에도 3김 사이에는 협상테이블에서의 자세, 언론과의 관계, 가신그룹 관리방식, 건강관리비법 등 여러 행태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허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정치행태를 기반으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주역으로서 큰 몫을 이뤄냈다. 14대 대통령 YS는 `담백한 승부사‘로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단행` 등 과감한 개혁조처를 이뤄냈다. 15대 대통령 DJ는 `세심한 협상가`로서 `IMF 외환위기 극복`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국가적 과업을 달성했다. 비록 대통령의 꿈은 못 이뤘지만 9선 의원에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역임한 JP는 `노련한 전략가`로서 `1965년 한일협정`이나 `DJP연합` 등 어려운 과제들을 수없이 풀어나갔다.
DJ에 이어 두 번째로 저 세상으로 떠난 YS도 마지막으로 ‘화해와 통합’을 당부했다. 한국 민주화를 이끌어 온 두 주역이 남긴 이러한 유언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념간 계층간 ‘극한대립과 분열’이라는 사회병리현상을 하루속히 치유하는데 정치인은 물론 모든 국민이 온 힘을 다해 달라는 당부일 것이다. (끝)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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