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준 조교사
- 한국경마의 모든 풍상을 온몸으로 이겨낸 35년 산증인
- 정년은퇴 후 마주로 경마인의 삶을 이어가길 희망

한국경마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박덕준 전(前)조교사가 6월 경마를 끝으로 정년은퇴를 했다.
조교사로서 35년여의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후배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 박덕준 조교사는 아직 한창(?)인 나이에 자신의 삶의 전부이던 조교사의 삶을 접게 된 것에 대해 시원한 마음보다는 섭섭함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때문에 조교사로 출발을 기다리는 많은 후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최근 조교사의 연장신청이 마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연장신청을 했었다고 한다.
1976년 뚝섬경마장에서 조교사의 첫 발을 내딛은 박덕준 조교사에게 당시 경마장은 이미 떨쳐 버릴 수 없는 천직이었다. 이미 수년간 기수로서 활동을 했던 그는 어린나이에 생계보다는 말이 좋아서 견습기수로 경마장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꽃다운 나이라고 표현되는 청춘의 시기가 박덕준 조교사에게는 그리 즐거운 기억으로 남지는 않는다. 기승을 위해 체중조절을 해야했던 그에겐 20대의 대부분 세월을 체중과 싸우며 생활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경마장에는 16∼8명 정도의 기수가 전부였고, 한 명이 조교사, 기수, 관리사의 역할을 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현재의 경마만을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속에서 경마가 명맥을 이어왔고, 그런 선배들의 노력과 눈물이 토양삼아 지금의 경마가 만들어진 것이기에 많은 후배 경마인들을 보면서 가끔씩 당시의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경마를 지켜온 동료들을 회상한다.
요즘에야 말들이 먹는 사료도 다양화되고 외국에서 수입도 해오지만, 그때는 한강변에서 풀을 직접 베다가 먹였다. 대부분 풀베기를 할 수 있는 시간대가 비슷했기 때문에 한가한 때를 골라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짝을 맞춰 한강변을 훑고 다녔다. 어찌보면 참으로 고된 일이라고 생각되겠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말과 함께 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시기였다.
박덕준 조교사의 경마장 삶은 뚝섬시절을 거쳐 과천서울경마공원으로 이어졌고, 크고작은 일들이 경마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면서 때론 웃고, 때론 슬픔에 가슴 아파해야 했다.
함께 기수로 출발했던 가장 친한 동료를 경마장에서 떠나보내야 했을 때가 가장 아쉬움을 남는다는 박 조교사는 변화된 경마팬 인식을 얘기하면서 더불어 한국경마가 발전해온 만큼 모든 경마인들과 경마관련 분야가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한국경마에선 1천승을 훌쩍 뛰어넘은 박태종 기수에 대한 얘기가 빠지질 않는다. 하지만 1천승의 대기록은 비단 박태종 기수만이 아니다. 바로 박덕준 조교사의 기록 또한 1천승을 넘어선지 오래다. 물론 마사회가 인정하는 총전적은 6342전 623승 2위 585회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마사회가 제공하는 자료는 84년 이후부터 집계된 자료로 75년부터 84년까지의 성적이 누락된 것이다.
박덕준 조교사의 누락된 성적은 3204전 490승 2위 417회로, 여기에 마사회가 제공하는 전적을 합하면 9546전 1113승이 된다. 이것을 토대로 할 때 박덕준 조교사는 지난 2003년 6월 ‘자비스’로 이미 1000승을 기록한 바 있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큰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40여년동안 경마장을 지켜오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선사한 박덕준 조교사, 그리고 남은 여생을 또다시 말과 함께 하고 싶다는 그가 바로 진정한 경마인의 표상일 것이다.


- 40여년의 경마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은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경마장에 입문하게 됐지만, 생계보다는 말이 좋아 경마장에 발을 딛게 됐다. 견습기수로 출발해 체중조절 문제로 조교사 전업을 했고, 이후 조교사로 35년이란 세월을 지냈다. 말 그대로 3번 강산이 바뀐 것이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경마장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생활해 왔다. 정년을 맞아 시원섭섭하지만 후배들이 더 발전된 한국경마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제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려 한다. 그동안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많은 경마관계자들과 동료 조교사, 그리고 경마팬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 정년은퇴 후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 어려서부터 경마장 생활만을 해왔기 때문에 당장 내일부터 상당히 당황스러울 것이다. 아직 특별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경주마와 함께 평생을 같이 해온 만큼 현역에서 은퇴를 했더라도 경주마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마주로서 남은 인생도 경주마를 돌보고, 경마와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경마장의 산증인으로 불리우는데, 조교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것은 언제인가?
▲ 굳이 어떤 하나를 꼽기가 어렵다. 1년에 수십 두의 경주마가 도입되고 은퇴하는데, 모든 조교사들이 그렇지만 나 또한 관리하는 경주마들이 좋은 성적을 거둘 때가 가장 보람있던 것 같다. 개인마주제 이전에는 모든 경주마가 마사회 소속이었는데, 개인마주제가 시행되면서 각 마주별로 자신의 경주마에 애정을 가지고 많은 관심을 표하는데, 어린 말을 키워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기쁨을 줄 수 있을 때가 큰 보람을 느낀다.

- 경마장에선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조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 경마장에서 근무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사회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일반 사회인들과 교류가 막히는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만큼 경마장 식구끼리는 친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함께 하던 동료들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던 것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 함께 기수생활을 했던 동료와 때론 경쟁하고 때론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던 선후배 조교사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중도하차할 때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 수많은 명마들을 관리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경주마가 있다면?
▲ 뚝섬시절 ‘호스킹’이라는 마필과 ‘카우보이’란 경주마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카우보이’란 경주마는 마사회로부터 2만원에 구매해 대활약을 펼치다가 다시 마사회에 15만에 팔았던 기억이 남는다. 과천서울경마장에서 활약한 경주마중에선 ‘훌라밍고’를 잊을 수 없다. 96년 그랑프리를 비롯해 경마대회 2회 우승을 안겨준 마필로 구절이 좋지 않아 장수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씨암말로 활동하면서 배출한 자마들이 모두 2군까지 올라갈 정도로 좋은 마필이었다. 최근에 활동하고 있는 경주마중에선 ‘황룡사지’를 잊지 못할 것 같다.

- 한국경마의 내일을 책임질 후배 조교사들과 경마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직업의 특성상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되는 조교사들은 오히려 떨어져 사는 형제보다 더욱 긴밀할 수밖에 없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지만 길게는 3∼40년을 한솥밥을 먹고 지내야 하기 때문에 친형제보다 오히려 더 우애를 가져야 한다. 아무쪼록 모든 조교사들이 아무 사고없이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루고 훌륭하게 정년을 맞길 기원한다.
경마는 경마팬이 있기에 존재한다. 경마팬 모두가 건전한 경마, 즐기는 경마를 해주시길 부탁하며, 모든 경마인들을 응원해주고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경마팬이 많이 늘어나길 기대해 본다.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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