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문화 창간 14주년
‘선진경마문화 창조’의 기치를 내걸고 첫 발을 내딛은 이 올해로 창간 14돌을 맞았다. 유년기를 지나 이제는 어엿한 청년의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다가섰다.
우리 경마계는 지난 14년간 정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본지가 창간한 1998년은 ‘국적 있는 경마 시행’이라는 야심찬 목표 아래 본격적인 국산마 생산에 돌입한 원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2000년 사상 초유의 경마중단 사태, 2004년 파트국 진입, 그리고 최근 ‘미스터파크’의 경주 중 사고 등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본지는 이런 역사적인 순간마다 현장을 지켜왔고, 독자들에게 보다 심층적이고 정확한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열네 번째 생일을 맞아 본지는 발간호 커버를 통한 지난 14년간의 숱한 화제와 이슈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편집자주)

1998년 6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은 지금까지 1600여 호를 발행 중에 있다. 2005년 부산경남경마공원의 개장과 더불어 종전 주당 2회 발행에서 3회(금,토,일) 발행체제로 변화하면서 주간지로 출발해 이제는 일간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마문화신문의 14년 동안 수많은 인물과 말(馬)이 커버를 장식했다. 커버스토리에 나온 이들만 살펴봐도 한국경마에 어떤 변화가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마문화신문의 표지를 가장 많이 장식했던 인물과 말(馬)은. 국민기수라 불리는 박태종 기수와 2000년을 전후해 과천벌을 호령한 ‘새강자’다.
모두 50여회나 본지의 표지를 장식한 박태종 기수는 2위 문세영 기수(32회)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경주마 쪽에서는 ‘새강자’가 22회를 기록, 역대 최고 스타경주마임을 입증했다. 특히 ‘새강자’는 1998년에서 2000년 동안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표지에 등장, 이슈메이커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1998년 6월 20일 경마문화신문의 창간호 표지는 김문영 발행인이 장식했다. 언뜻 창간호 표지에 발행인이 등장한다는 것이 의아스러운 일이겠지만, 당시 문화일보 경마전문기자로 명성을 날리던 김 발행인의 인지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탁월한 예상 적중률과 해박한 지식은 물론 한국마사회 최초의 경마대회 해설가로서 전국 경마팬에게 확실히 그 이름 석 자를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김 발행인의 명성은 창간 초기 경마문화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경마문화는 몰라도 김문영은 안다”는 팬들의 심리를 확실히 꿰뚫은 셈이었다. 광대복을 입은 김 발행인의 그림이 지금에 와서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말이다.
한동안 김 발행인이 표지에 등장해오다 발간 제43호(1998년 12월 5일자)째를 맞으면서 드디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표지내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포문을 연 것은 마감특종으로 다루었던 전국 마필관리사 노동조합의 전신인 서울경마장 조기협회 노동조합의 파업 예고 사건이었다. 마사회가 마필관리사의 임금을 삭감하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당시 이기호 노조위원장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는 등 노조 측에서 경마중단도 불사하겠다는 태세였지만 결국 타협안을 찾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2년 후인 2000년 5월 또다시 한국마사회와 조교사협회노동조합(현 마필관리사 노동조합) 간의 임금교섭이 결렬되면서 5월7일에 예정된 12개 경주 중 10개 경주가 취소되는 한국경마 역사상 초유의 경마중단 사태를 맞았다. 당시 한국마사회 서생현 회장까지 협상 테이블에 나와 사태진화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경마중단에 격분한 일부 경마팬은 마주실 내 집기를 파손하는 등 난동을 부린 주동자 6명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2007년 12월 경마발전 중장기 계획과 관련해 한국마사회와 유관단체 간의 불협화음으로 사상 2번째 인위적 경마중단 사태가 발생,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당대 최고의 스타 박태종과 김효섭은 당시 엎치락뒤치락 하는 다승경쟁으로 연일 화제거리를 낳으며 창간 초기 표지를 장식한 인물들이다. 박 기수가 파워의 대명사라면, 김 기수는 과천벌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특히 김효섭 기수는 깔끔한 매너와 군더더기 없는 기승술로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라이벌 구도에 포커스를 맞추어 기사를 뽑아내는 일은 기자들에겐 하나의 즐거움이었고, 팬들에게도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경주마가 표지에 등장한 것도 얼마 후의 일이었다. 1998년 그랑프리를 우승한 ‘신세대’가 그 주인공이었다.(본지 제47호) ‘울프사일런서’, ‘대견’ 등 기라성 같은 마필들을 상대로 7마신 차의 대승을 거둔 ‘신세대’는 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해 화제를 모았다.
창간 무렵부터 본지의 표지를 장식한 또 다른 경주마로 ‘새강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지가 창간한지 딱 2개월 되던 시점에 데뷔한 ‘새강자’는 데뷔전을 제외하고 연승가도를 달리며 연일 1면기사를 장식했다. 특히 다음해(1999년) 12월 열린 그랑프리에서는 기라성 같은 외산마를 물리치고 국산마 최초의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비록 그가 기록한 최다연승(15연승)은 지금에 와 깨지고 말았지만 20세기 최고의 경주마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새강자’의 활약에 고무되었는지 1999년 제123호 표지의 “5억짜리 씨수말 퍼시픽바운티 도입”과 제141호의 “국산마 대약진”이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띈다. 지금에서는 국산마들의 수준이 평균적으로 외산마와 비교해 크게 뒤처지지 않고 있지만, 국산마 생산 초기였던 당시 국산마가 외산마를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용사위’, ‘봉명’, ‘건곤청기’ 등 국산마 중에서도 중위권 정도에 불과했던 경주마들이 외산경주에 출전해 선전을 펼치며 화두를 만들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본지 기사에서는 “10억대를 상회하는 씨수말의 도입이 가속화 될 것이고, 다가오는 21세기는 국산마가 외국산마를 능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10여년이 지난 현재에 와서 현실화 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 본 기자의 날카로운 시각에 소름이 돋는다.
2001년 제295호는 본지 표지에 처음으로 여성이 게재되었다. 한국경마 70년 사상 처음으로 정규 여성기수의 등장을 알린 내용이었다. 20기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경주로에 데뷔한 이금주, 이신영은 첫 날 각각 2개경주와 1개경주에 기승해 여성기수 탄생의 물꼬를 텄다. 역사적으로 보면 최초의 여성기수는 이옥례로, 74년 단기 교육과정을 마치고 21세의 나이로 데뷔해 6개월간 활약한 바 있으나 정규 여성기수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금주는 2006년 초 결혼에 골인하며 최초의 주부기수로 활약중에 있으며, 이신영은 2010년 최초의 여성 조교사로 거듭나며 그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들의 활약이 발판이 된 여성기수들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 여성기수가 최고의 경주인 그랑프리를 우승하는 날도 머지않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대한민국을 붉은 물결로 물들게 했던 2002 한일월드컵의 열기는 경마문화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374호의 표지는 당시 서울경마공원 전광판을 통해 중계된 8강 대 스페인전의 응원풍경을 담았다. 경마가 아닌 내용을 표지로 다루기는 처음이었다. 제390호에서는 50억 원대 규모의 사설경마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설경마의 심각성’을 표지에 내세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에는 사설경마가 횡행하는 이유에 대해 합법경마의 환급률이 낮고 베팅금액 상한제에 따른 소위 ‘큰 손’들의 이탈이었지만, 최근의 현상은 온라인 베팅 폐지로 인해 일반 소액구매자들도 접근의 편리성 때문에 사설경마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 그 심각성이 더해가고 있다.
이밖에도 2002년 한해는 ‘외산마 개별수입제 허용’, ‘해암장군의 3관 달성’ 등 그 어느 해보다 갖가지 이슈들로 본지 커버스토리를 메웠다.
우리 경마 역사상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던 ‘파트국 진입’과 ‘역대 2번째 아시아경마회의 개최’도 경마문화가 걸어온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2004년 제566호에 게재된 “파트(part)국 진입, 의미는 무엇인가”의 기사를 통해 한국경마의 파트국 진입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다. 특히 이 기사에는 당시 한국마사회 국제협력팀 박양태 팀장의 인터뷰를 곁들여 눈길을 끌었다. 해외경마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박양태 씨는 현재 부경경마공원 경마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5년 5월은 제30회 아시아경마회의(ARC) 개최로 경마계가 분주했다. 본지도 3주간에 걸쳐 특집호(654호~)를 구성하며 한국경마의 역대 2번째 ARC 개최를 자축했다. 특히 ARC기간 중 김문영 본지 발행인은 당시 이우재 한국마사회장 겸 조직위원장과의 단독 대담을 통해 그 의미를 고취 시켰고, 회의 폐막 하루전에는 로렌스 웡 ARF(아시아경마연맹) 의장과 만나 대한민국 대표 경마전문지 경마문화신문의 위상을 알렸다.
2007년에 발간된 제919호에서는 이례적으로 미국 켄터키더비 관련 기사를 톱으로 실었다. 그 이유는 제133회 켄터키더비에 출전한 ‘도미니칸’이라는 경주마가 우리 씨암말 ‘퍼스트바이올린’의 자마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도미니칸’이 11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우리 씨암말의 자마가 최고 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역시 우리 씨암말 ‘월들리플레저’의 자마인 ‘게임온듀드’가 브리더즈컵 클래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또한번 화제를 모았다.
박태종 기수의 통산 1500승 달성(1233호), 신우철 조교사 통산 1000승 달성(1468호), 미스터파크의 최다 연승 기록 갱신(1560호) 그리고 본지의 업계 최초 대통령상 수상 소식(1148호) 등도 경마문화 창간 이래 14년의 역사를 장식했던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경마문화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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