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이 ‘한·중·일 문화 속의 말’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레이싱미디어 이용준

이어령 전 장관, ‘한·중·일 문화 속의 말’ 기조강연서 밝혀

2014 갑오년 청말띠의 해를 기념해 열린 국제적 학술대회, ‘한·중·일 문화 속의 말’이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 대강당에서 지난 12월 20일 개최됐다. 국립민속박물관과 (재)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소장 이어령),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BK21사업단이 주최하고 인간동물문화연구회(회장 이항)이 주관하는 이번 학술대회에는 100여 명의 일반인이 참가, 말띠 해를 앞두고 말에 대한 관심을 선보였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은 이번 학술대회 기조강연에서 ‘정오의 햇빛 속에서 달리는 말갈기의 상징 속으로’를 주제로 발표했다. 올해로 팔순을 맞이한 이 전 장관은 십이지 동물 가운데 말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말은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른다. 어떤 짐승도 말을 앞서는 것은 없다. 그래서 말은 한 나라의 성쇠를 가르고 문명의 얼굴을 바꿔놓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특히 한중일의 문화를 비교하는 상징적 면에서 말은 어느 짐승보다도 중요한 가늠자 역할을 한다며 “우리 말 문화는 한국인이 일본 땅을 개척하고 다스린 지배민족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마문화 전통이 사라지고, 유목에서 농경으로 문화가 급속히 중국화하면서 “말은 12지 안에서만 살아 숨 쉬어왔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이 전 장관은 “다른 12지의 동물과는 달리 말은 한중일 문화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글로벌한 문화와 어울리고 섞이는 데 있어서 한국인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부 ‘문화로 만나는 말’에서는 한중일 말 문화 전문가들이 각국의 고유한 말 문화를 소개 비교했다. 하마다 요 테이쿄대학교수는 ‘동아시아 공동문화유산으로서의 일본 말’, 왕민 호세이대학교수는 ‘말이 이어주는 한·중·일’,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백마 탄 초인이 있어’에 관한 발제를 진행했다. 특히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고고학적 유물 자료와 각종 사료를 언급하며 말은 건국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우리 조상이 말 타는 민족이었음을 주지시켰다.

2부 ‘말과 친해지기’에서는 천명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가 ‘한국의 마의학 전통’에 대해, 노정래 서울대공원 동물원장이 ‘말의 행동 생태’에 대해, 김연희 한국재활승마학회장이 ‘말과 인간-승마재활프로그램’에 대해 발표했다. 이 가운데 천명선 교수는 우리나라 중세 마의학 서적이 중국의 마의술과 우리 전통 마의학 기술을 집대성해 편찬된 것이라며, “우리나라 중세 마의학 서적은 말의 본성을 배려하고 인간과 말이 소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했기에 그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은 2014년 청말띠의 해를 맞아 ‘힘찬 질주, 말’ 특별전을 12월 18일부터 내년 2월 17일까지 기획전시실 2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또 경기도 용인시 소재 경기도박물관(관장 이원복)도 ‘2014 갑오년 말띠해 틈새전: 말 타고 지구 한 바퀴’ 전시회를 내년 12월 말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 말 문화 뿐 아니라 세계 말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십이지의 의미, 말의 신체적 특징과 상징 등을 전시한다. 특히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 ‘기마인물형토기’,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 라스코 동물 벽화의 ‘말 그림’ 등 사진과 통일신라시대의 ‘말 모양 토우’ 등 유물을 전시하는 등 직접 말을 배울 수 있는 과정으로 꾸며졌다. 또 말을 소재로 한 동화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말과 함께하는 작은 도서관’도 마련하고, 말과 관련된 경기도박물관 소장 유물도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용준 기자 cromlee21@krj.co.kr

[전문] 정오의 햇빛 속에서 달리는 말갈기의 상징 속으로 -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십이지의 동물들 가운데 인간과 함께 살아온 가축은 소, 토끼, 말, 양, 닭, 개, 돼지로 과반수가 넘는 일곱 종류다. 그중에서 가장 몸집이 크고 빠른 것이 말이다. 몸의 크기로 말과 겨룰만한 가축으로는 소를 들 수 있지만 그 속도에서는 극과 극이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하여 천리마라고 하고 하늘을 비상한다하여 천마(天馬)니 용마(龍馬)니 하는 말도 있다. 동서 할 것 없이 말은 일찍이 인간이 부리는 가축의 하나지만 때로는 신으로 떠받들기도 하는 영물이다.
말은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른다. 활에서 날아가 화살처럼 곧바로 앞만 보고 질주하는 그 성격 때문에 사냥터와 전쟁터에서는 어떤 짐승도 말을 앞서는 것은 없다. 그래서 말은 한 나라의 성쇠를 가르고 문명의 얼굴을 바꿔놓는 역할을 한다.
말이 자동차로 바뀌고 기병대가 탱크부대로 변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는 힘의 단위로 마력(馬力)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여전히 경마장에서 천리마의 꿈을 재현하며 환호한다. 힘이나 속도만이 아니다. 12지 속의 말은 방향은 정남이고 시간은 정오로 태양이 정수리에 오르는 대낮이다. 그래서 말띠 특히 백말 띠에 태어난 여인은 운명이 거세다하여 최근까지도 혼사의 핸디캡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하는 상징적 층위에서 말은 어느 짐승보다도 중요한 가늠자 역할을 한다. 한족은 늘 말을 탄 유목민에게 압박을 받아왔다. 그 거대한 만리장성이 말에 대한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천고마비의 원래 뜻이 가을이 되어 살찐 말을 타고 수확한 농작물을 약탈하러 오는 기마족들의 두려움을 일컫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마족의 도래설을 놓고 일본 학자들이 열띤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고대 능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된다. 말을 타고 건너온 한국인이 일본 땅을 개척하고 다스린 지배민족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말에 관련된 문화이다. 일본의 종교(신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마(繪馬)이듯이 한족과 마찬가지로 농경문화를 근본으로 한 중국의 한족과 일본 민족들에 있어서 유목문화의 이입문화를 말발굽을 따라 추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말은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이 말을 타고 180도로 몸을 돌려 사냥감을 향해 활을 쏜다. 이 놀라운 기사(騎射)를 보면서 우리는 한국문화를 결코 중국이나 일본의 농경문화적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왕자를 찾으러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남편을 만류하기 위해 박제상의 아내가 말을 타고 뒤쫓는 삼국유사의 한 장면을 보아도 말이 얼마나 한국인의 생활 속 깊이 배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 그러한 기마문화의 전통이 사라져 조선조에 오면 말은 소로 변하면서 뒷전으로 사라진다. 문학작품이나 회화 그리고 민속면에 있어서도 한국은 오히려 일본보다도 더 말의 상징적 역할을 미미하다. 어지러운 말의 속도보다 소잔등에 타고 피리를 부는 것이 한국의 목가적 풍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 가지 설은 있지만 말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라고 되어 있으며 한국이 자랑하는 과하마가 그 원종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민족의 원류에는 말이 있으며 우리가 그 원류로부터 멀어지면서 말은 소에 의해서 대체된다. 유목에서 농경으로 한국의 문화가 급속히 중국화하면서 말은 12지 안에서만 살아 숨 쉬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12지의 동물과는 달리 말은 한중일 문화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글로벌한 문화와 어울리고 섞이는 데 있어서 한국인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말의 신화 그 말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시대와 함께 변해온 한국의 문화적 궤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렵 전쟁 그리고 물건을 움직이는 동력의 원천만이 아니라 오행사상의 상징체계로 이루어진 12지의 말은 남쪽과 대낮 여름에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로 솟아오른다. 절정의 시간이요 빛과 불의 공간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느릿느릿 걷는 황소의 힘과 대칭적인 문화로 뛰고 도약하고 넓은 초원을 달리는 한국문화의 원형을 일깨운다. 다시 돌아온 말, 한국인의 문화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된 기마인의 기개와 활력을 되짚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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